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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화공주’가 왜 필요했을까
작성자 Dyhalt
작성일 2009/01/22 05:36
조회수 192
639년 정월 29일. 백제의 무왕과 왕비, 그리고 많은 신하들은 미륵사석탑에 불사리를 봉안했다. 그리고 천 수백 년의 바람에 가람은 무너졌고, 겨우 서쪽의 석탑만이 시멘트에 의지해 힘겹게 버텨오고 있었다. 이 탑의 정비 수리를 위한 해체 과정에서 사리병과 사리봉안문, 구슬 등 500여점의 유물이 고스란히 수습되었다. 1370년의 세월을 기다려 세상에 알려진 유물과 기록, 그것을 대하는 감회는 놀랍기만 하다.

어느 날 무왕과 왕비는 익산의 용화산 아래 큰 못가를 지나고 있었다. 그때 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홀연히 나타났다. 왕비는 이곳에 절 세우기를 원했고, 왕은 이를 허락했다. 못을 메워 법당과 회랑과 탑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삼존을 모신 뒤에 미륵사라고 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미륵사 창건설화다. 기록과 같이 이 절이 삼원(三院) 가람으로 되었음은 발굴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세 법당을 세운 것은 미륵삼존과 용화삼회(龍華三會)를 상징했던 것이다.

미륵사가 왕비의 발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이번에 나타난 사리봉안문으로도 확인된다. “나 백제왕후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과거 오랜 세월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만민을 돌보고 불교의 동량(棟梁)이 되 어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이 구절은 특히 주목된다. 역사 사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미륵사 창건을 발원했던 왕비는 신라의 선화(善花)공주였다. 그런데 이 기록은 무왕의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밝히고 있다. 무왕의 왕후가 백제 귀족 출신이었음은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사택씨는 백제 8대 성중의 하나로 유력한 귀족가문이었다.

사리를 봉안한 기해년, 즉 법왕 40년(639)은 미륵사 창건의 연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륵사의 가람배치를 삼원(三院)으로 했던 것은 용화삼회를 상징하는 하나의 설계였음을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와의 로맨스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이야기다. 이 때문에 무왕의 왕후가 백제의 대표적인 귀족의 딸이라는 기록으로 선화공주이야기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삼국유사에는 역사와 설화가 혼재하고 있다. 무왕설화를 사실로 보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설화라면 언제 무슨 의도로 생겨난 것인지,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 많은 토론이 필요하게 되었다. 백제의 혜왕과 법왕은 1년 남짓 재위했다.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라지만, 삼국유사에는 과부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 마를 캐며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왕의 출신이나 즉위에는 어떤 그림자가 남아 있다. 그래서 신라 진평왕의 공주가 필요했을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설화 속에 숨어 있는 역사 진실을 찾아내는 일도 역사 속에 묻어있는 설화의 눈덩이를 걷어내는 일도 중요하다. 역사와 설화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김상현 동국대 교수
(경향신문, 200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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