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로마사] 율리우스 카이사르 |
|---|---|
| 작성자 | Dyhalt |
| 작성일 | 2008/05/05 09:12 |
| 조회수 | 177 |
|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기원전 1세기 경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 서양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로, 서양의 근본이 로마가 되도록 한 인물.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사람은 자기가 보고자 하는 현실만을 본다." 등의, 누구나가 한 번씩은 들어봤을 주옥 같은 명대사가 모두 카이사르가 남긴 말이다. 이런 재치있고 핵심을 찌르는 언변과 카리스마를 통해 군중을 휘어잡고, 군사에서도 뛰어남을 발휘, 군인과 민중 모두를 매료시켜 마침내 모든 정적들을 꺽고 로마의 최고 지배자(독재관)가 되었다. 사실상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카이사르도 처음부터 화려한 인생을 산 것은 아니었다. 그가 31세 되던 해, 지브롤터 해협 근처의 카디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초상을 보고 그는 30세에 이미 세계를 정복했는데, 자신은 뭐하고 있는 건가, 라고 한탄하며 눈물 흘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로마인은 보통 귀족의 경우, 개인이름, 씨족이름, 가문이름의 3 가지 이름을 가지는데,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씨족의 카이사르 가문의 가이우스란 뜻이 된다. 율리우스 씨족은 로마 창건 당시부터 유서 깊은 집안이었지만, 카이사르 이전까지 활약한 인물이 전무하다 시피한 가문이었다. '카이사르'는 카르타고 어로 코끼리를 뜻하는데, 한니발과의 전쟁 당시, 율리우스 씨족의 한 인물이 활약을 통해서 얻게 된 별칭으로, 이 별칭이 가문 이름이 된 것이다. 이에 반해, 후의 라이벌인 폼페이우스나 크라수스는 아버지가 모두 집정관을 지낸 유력 귀족 가문이었고, 이 당시 자신들 또한 로마 최고의 명예직이며 최고위 관직인 집정관에 취임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 카이사르의 탄생과, 당시 로마의 사회적 배경 카이사르의 집안은, 유서 깊은 명문 귀족이지만, 오랜 기간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던 탓에 부유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주로 서민층이 사는 수부라 거리에 카이사르 집안의 집이 있었고, 그의 고모뻘 되는 여성이 민중파의 영수, 마리우스(Gaius Marius, BC 156~BC 86)와 결혼 한 인연 등으로, 일찍 부터 민중파의 영향을 받았다. 카이사르가 12세 되던 해, 마리우스와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BC 138?~BC 78)가 동방 원정의 지휘권을 두고 다투는 일이 발생했다. 민중파의 영수이자, 대장군인 마리우스가 동맹시 전쟁에서 급격히 부상하여 집정관까지 오른 술라와 자존심 대결을 벌인 것이다. 처음 최고사령관으로 뽑힌 것은 술라로서, 그가 이미 군대를 소집하고 출발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마리우스가 호민관 술피키우스와 손을 잡고 의결을 뒤집어 최고사령관에 부임했다. 그러자 술라는 이에 반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쳐 들어왔으며, 로마 역사상 수도 로마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온 장군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대비를 안 했던 마리우스의 민중파는 간단히 제압당하고 만다. 마리우스는 간신히 탈출했지만, 술라와 원로원 파에 의해 민중파 인물들은 대거 숙청을 당하게 된다. 사건을 일단락 짓고 술라는 동방으로 원정을 떠나고, 이에 맞춰 마리우스가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로마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원로원파가 숙청을 당할 차례가 온 것이었다. 이리하여 민중파와 원로원파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버리고, 이후 제정확립까지 약 100여년간 극심한 대립을 하게 된다. 마리우스는 원정 나간 술라가 돌아오기 전에 죽고, 그 뒤를 이어 킨나(Lucius Cornelius Cinna)가 민중파의 영수가 됐다. 든든한 동지를 잃은 그는 원로원에게 화해의 제스쳐를 보내는 한편, 마리우스의 조카뻘인 카이사르와 딸을 결혼 시켜 민중들의 지지도 신경썼다. 돌아올 술라를 의식한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동방 원정을 성공리에 마친 술라는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로마를 향해 진군한다. 이에 맞서 민중파도 군대를 모아 양측은 충돌하게 되는데, 수는 민중파가 더 많았지만(평민들이 자발적으로 너도나도 지원했기 때문이다), 지휘관의 능력차로 인해 패배, 술라가 정권을 잡게되고 술라의 공포 정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술라의 민중파 숙청 바람 속에서, 카이사르도 죽을 처지가 되고 마나, 많은 지인들의 구명 요청으로 카이사르는 민중파인, 킨나의 딸과 이혼을 조건으로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받게된다. 여기서 18세의 카이사르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외국으로 도망을 택한다(BC 82). 이는 매우 중요한 선택이었으며, 이후 그는 평생 민중파의 편에서 원로원파에 대항하는, 소수로 다수를 상대하여야 하는 험난한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 장년기의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부상 술라 사후,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그다지 눈의 띄는 일 없이, 평범한 삶은 보내다가, 32세에 드디어 히스파니아(지금의 스페인 지역)에 회계감사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BC 70). 귀국 후 카이사르에게 또 한가지 전환점이 생기는데, 그것은 바로 고모뻘의 율리아(마리우스의 부인)의 사망이었다. 율리아의 장례식에서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초상을 함께 게시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이로서 그는 민중파를 재건할 것임을, 그리고 자신이 민중파를 이끌 것임을 암묵적으로 표시한 것이었다. 서민들은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다 술라의 원로원파에 무참히 죽어간 민중파 사람들의 처참한 최후를 떠올리면 눈시울을 붉혔음이 틀림없었다. 이 무렵, 또 다른 이유로 민중은 고달팠는데, 지중해에 날뛰는 해적들 때문에 식량 공급이 원할하지 못해, 식량의 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원로원은 폼페이우스 - 사실상 카이사르의 유일한 라이벌이 될 - 를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해적 소탕에 나서는데 39세의 폼페이우스는 약 3개월여 만에 해적들을 깡그리 소탕한다(BC 67). 이로인해 그는 명실공히 '마그누스(위대한 자)'라고 불리어지게 되며, 민중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카이사르 나이 37세, 최고제사장이 사망하여 그 자리가 비게 된다. 로마의 최고제사장은 투표로 뽑는데, 카이사르는 이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BC 63). 최고제사장은 말 그대로 제사를 주관하는 최고 신관이기는 하지만, 아무런 권력이 없는 명예직으로, 카이사르가 출마하자 다들 어리둥절 해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최고제사장에 당선되지 못했을 때에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기다리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어머니에게 남기고 출마, 기어코 당선되었다. 이후 이 최고제사장직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황제의 권위 중 하나로 흡수되게 된다. - 카이사르의 부상 39세의 카이사르가 지금의 스페인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시기(BC 61),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정계에서 제거당해 쓸쓸한 처지가 되어있었다. 해적 소탕에 이어 동방 원정마저 성공시킨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걱정과는 달리 원로원의 약속을 믿고 흔쾌히 군대를 해산했지만, 원로원은 그와 약속한 바를 일부만 들어주고, 일부는 지키지 않았다. 제대 장병의 퇴직금(이라기 보다는 땅) 문제를 얼렁뚱땅 넘겨 버리고, 군대가 없는 폼페이우스를 이빨빠진 호랑이라고 보고 정계에서 추방해 버렸던 것이다. 크라수스의 경우, 국고를 능가하는 재산을 가졌을 정도로 엄청난 부호였지만, 사람들에게 지독히도 인기 없는 인물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그가 그리 큰 돈을 벌수 있었 던 것은, 민중파 숙청기에 그들의 재산을 헐값에 경매로 사들여 그것으로 자본을 불렸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점점 정계에서 소외받다가 이무렵에 와서는, 정치에 있어서는 무시할 수는 없지만, 가까이하기는 다들 꺼리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원로원에게는 단 한 명의 문제아만이 남아있었다. 민중파의 부흥이라는 어리석고 위험한 생각을 하는 사내, 카이사르였다. 속주 총독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 카이사르는 집정관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에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낙선을 획책하였다. 그것을 간파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끌여들여, 그 유명한 '삼두정치'를 이루어 내게 된다. 바로 제 1차 삼두정치의 시작이었다(BC 60). 카이사르에게 있어 삼두정치의 제일 큰 문제는, 폼페이우스가 너무 뛰어나고 너무 큰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아직까지 민중파의 계승자에 불과했고, 민중의 인기와 신망을 가진것은 폼페이우스였다. 즉, 둘의 연합으로는 도저히 대등한 관계가 될수 없었는데, 여기서 카이사르는 크라수스를 끌여들여 균형을 맞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사이가 극히 나빴던 점이다. 이 둘은 모두 술라 휘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면서도 사이가 나빴다.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의 속물 근성을 경멸했고, 크라수스는 젊은 나이로 집정관과 개선식 모두를 차지한 폼페이우스에게 질투를 느꼈으며 그의 거만한 태도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카이사르는 알면서도 역이용했다. 즉, 폼페이우스에 대한 경쟁심에 불타는 크라수스를 자극하여, 자신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큰소리 탕탕치게 만들었다. 난관은 폼페이우스였을 테지만, 아마도 그의 우월의식 - 그는 인생에서 패배를 모르고 산 사람이었다 - 을 이용해서 동맹을 성립케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삼두정치로 날아오르다 삼두의 동맹에 의해 원로원의 낙선 운동을 타파하고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BC 59). 카이사르는 민중에게 자신이 인기 있다는 것은 알고있지만, 그것이 신망은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개선식을 행했을 때 비로소 얻을 수있다고 생각한 그는, 삼두라는 든든한 정치적 발판을 이용,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 원정에 나선다. 삼두에 대한 확실성을 위해, 카이사르는 자신의 딸을 폼페이우스에게 시집 보내고, 크라수스에게서는 돈을 더욱 더 많이 빌린다. (이 부분이 의아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통상 빚이라고 하는 것은 빌려준 쪽에서 큰 소리 치기 마련이지만, 어마어마한 돈을 빌려줘 버리게 되면, 예를 들면 30억을 빌려줬다고 해보자. 채무자가 망하게 되버리면 이 돈이 날아가 버리므로, 채무자가 망하지 않게 계속적으로 울며 겨자먹기로 돈을 빌려줄 수 밖에 없다. 크라수스는 실로 이 상태에 빠져있었다. 단 그의 경우, 카이사르와의 사이는 아주 좋았다. 카이사르의 경우 원래 유쾌한 사람으로, 같이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밝게해주는 능력이 있었고, 속물 취급 당하던 크라수스와는 젊은 시절부터 오랫기간 사귀어온 사이였다) 카이사르는 9년에 걸쳐 갈리아에서 정복 활동을 펼쳤는데, 그는 전쟁 도중에 틈틈히 글을 써, 갈리아전기를 펴냈다. 이는 로마에서 출판하는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어, 로마의 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고, 원로원파의 많은 자제들이 아버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 밑으로 달려가는 진풍경을 연출하게 된다. 이 와중에서 카이사르가 특히 아꼈던 인물로 데키우스 브루투스, 그리고 젊은 크라수스라고 불린, (삼두정치의)크라수스의 아들이 있었다. 특히 젊은 크라수스를 칭찬하는 얘기는 갈리아전기 곳곳에 등장하며, 그를 무척이나 총애했음을 알 수 있다.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항해술을 장기로 삼는 북방의 게르만족과의 해전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해전의 대가라는 별칭을 얻게 되고, 후의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하기도 했으며, 카이사르 유언장의 제 2 상속자로 지명되기도 한 인물이다. - 암운 갈리아 원정 5년 째인 BC 54년,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가 난산으로 사망한다. 폼페이우스는 실로 아내를 사랑했는데, 아내와 함께 아예 로마를 떠나 별장에서 살면서 정치에서 손을 떼다시피 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이어주던 유대의 고리가 끊어져 버린 것이었다. 기회라고 생각한 원로원파가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하였으나, 율리아를 진정으로 사랑했던지 그는 이를 거절하고 칩거를 계속한다. 이 무렵, 크라수스는 시리아의 총독으로 시리아에서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자진해서 맡은 일로, 카이사르의 계속되는 성공에, 자신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파르티아 원정을 주장한 것이다. 크라수스의 군사적 업적은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BC 73~72)을 제압한 게 전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이에 이를 걱정했지만, 삼두의 대등한 파트너인 크라수스를 말리진 못한다. 카이사르는 오랫동안 자신을 도와준 후원자인 그를 깊이 걱정했고, 크라수스 본인의 요청에 따라 젊은 크라수스를 기마병 500과 함께 보내주고,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휘하에서 근무했던 경험 많은 카시우스(후의 카이사르 암살을 일으키는)를 보내준다. 허나 크라수스는 본질적으로 군인도, 정치가도 아닌 '경제인'이었다. 시리아에 부임해서 군대양성에 신경쓰기 보다는, 그만 '나라를 위해' 세금 걷기에 열을 올리고 만 것이었다. 그런 훈련도 덜된 군대를 가지고 용케도 국경 근처를 얼쩡거리던 파르티아 군을 격퇴, 이것이 크라수스의 자신감에 기름을 붓고 말았다. 참모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정에 나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운 없음도 겹쳐, 총 인원 4만에 달하던 크라수스의 군대는, 탈출에 성공한 사람이 약 1만여 명. 포로로 잡힌 사람이 1만여 명으로 유례없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 로마 군단의 상징인 독수리 깃발도 모조리 빼앗기고 세계를 호령하는 로마의 최고권력자 한 사람이 죽기까지 한 것이다. (BC 53) 크라수스의 죽음으로 삼두의 균형은 깨어지고 말았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이어주던 율리아도 이미 없었다. 숙명의 라이벌, 두 사람의 대결이 다가오고 있었다. - 주사위는 던져지다 갈리아 원정 9년째인 BC 51년. 원로원은 이미 폼페이우스를 함락시키고 있었다. 군인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칼로써 상대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말을 무기로 삼는 정치가에게 말로써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폼페이우스의 허영심을 잔뜩 치켜세워주며, 카이사르의 공적을 지적하여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그가 국가에 해가 되는 인물이라고 대의명분을 세워줌으로써,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국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이라며 원로원을 돕겠다고 약조를 하게 된다. 로마에서는 공직에 있을 때는 어떠한 소송도 걸 수 없게 되어있었다. 그것은 맡은 바, 일에만 집중 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에서 였는데, 이제 카이사르는 갈리아 속주 총독 임기가 끝나가고 있었고, 원로원은 어떠한 속주 총독도, 혹은 집정관 취임도 불허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갈리아 원정을 카이사르 개인의 사욕을 위해 행한 전쟁으로 규정, 국가의 군대를 임의 차출한 죄명으로 그의 타도를 벼르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몇 번의 교섭 시도를 했으나 무산 되었고, 이제 그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가서 맨손으로 법정에 서던지, 혹은 반역자가 되어 로마로 진군을 하던지 말이다. 당시는 겨울이었고, 각 군단이 갈리아 각지에 흩어져(왜냐하면 뭉쳐있으면 식량의 조달이 힘들다) 겨울나기에 들어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국경에서 제 10군단 단 한 군단만을 가지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 제 10군단의 장병들을 모아놓고, 원로원이 자신에 대한 중상모략을 가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들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낱낱히 말하고는, 이어 "본인은 9년 동안 그대들의 총사령관이었다. 로마를 위한 그대들의 노고는 본인의 지휘와 하늘의 도움으로 빛나는 전과를 만들어냈다. 그대들은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전 지역을 평정했다.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카이사르의 명예를 지켜주고 적들의 공격을 물리쳐 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라고 말하자, 장병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최고사령관의 명예를 지켜드리겠다고 충성을 맹세했다. 내전의 시작이었다. - 내전기 단 한 개 군단으로, 그것도 겨울에 루비콘 강(로마 본국과 속주 사이의 경계)을 건널 줄은 몰랐던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겨울 내에 군대를 모으고 훈련 시켜 봄에 있을 전쟁에 대비하려고 했던 그들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다. 그들은 수도를 버리고 폼페이우스의 근거지가 있는 남 이탈리아로 피난 가기로 한다. 거의 모든 원로원 의원이 폼페이우스와 함께 했고, 집정관들 마저 수도 로마를 떠나는 바람에 일반 시민들은 정부가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민들의 인식과, 신속한 카이사르 군대의 공격, 안이한 폼페이우스 측의 대처로 인해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반도 내의 기반을 잃었고, 그리스로 탈출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넌 후, 로마로 향하지 않고 폼페이우스를 맹추격 했지만, 폼페이우스는 봉쇄망을 돌파, 그리스로 건너는데 성공한다. 이제 내전은 지중해 세계 전체로 확대되는걸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폼페이우스의 배가 떠나는 걸 바라보던 카이사르는 로마로 향했다. (BC 49, 3월 17일) 로마에 입성한 카이사르는 부관이자 법무관인 레피두스에게 내정을, 안토니우스(후에 옥타비아누스와 자웅을 겨루는)에게 치안을 유지할 것을 명한다. 로마를,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 하에 넣기는 했지만 카이사르는 여전히 위태로운 위치에 있었다. 해적 소탕으로 지중해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준 폼페이우스에게는 지중해 세계의 모든 국가와 도시가 그의 클리엔타스 - 즉 폼페이우스의 세력에 가담 - 였기 때문이다. 이는 서쪽으로는 히스파니아(지금의 스페인 지역), 아프리카 북부, 그리스와 동방의 무역 도시들이 포함 되었다. 즉 카이사르는 포위 되어있는 셈이었다. 이때 이미 카이사르의 금고는 텅 비어, 카이사르는 곤란에 빠졌다. 그러나 행운은 카이사르의 편이었다. 집정관들과 원로원 의원들이 탈출 할 때 국고를 버려두고 간 덕에, 자금 문제는 해결 되었다. 자금 문제가 해결 되자 카이사르는 바로 행동에 나선다. 먼서 서쪽의 히스파니아 부터 쳐서, 등 뒤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했다. 동시에 곡창지대인 시칠리아 섬으로 쿠리오라는, 한때 원로원파로써 장래가 촉망되었던 카이사르가 '낚은' 젊은 원로원 의원을 파견한다. 쿠리오의 성공과 히스파니아 원정도 성공리에 끝나, 식량 문제와 등 뒤의 안전 문제를 해결한 카이사르는 독재관에 취임한다. 그리스에서는 폼페이우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듬해인 BC 48년 1월, 카이사르는 이탈리아의 브린디쉬 항구를 떠나 그리스로 향한다. 그리스에 도착한 카이사르. 그러나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폼페이우스의 강력한 해군에 보급선도 끊기고, 안토니우스는 합류조차 못할 뻔 했다. 안토니우스와 합류 후 디라키움 시(市) 공방전에서 패배, 파르살로스 평원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폼페이우스의 장인)과 대치 중인 수석 부사령관 도미티우스와 합류하기로 한다. 디라키움 패배로 전 그리스의 도시들이 폼페이우스의 편으로 돌아서기 전에 메텔루스를 쳐서 폼페이우스를 평원으로 유인, 모든 것을 건 단판 승부를 내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메텔루스를 버려둘 수 없었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속셈을 알면서도 디라키움에서 나와 메텔루스와 합류한다. 카이사르가 바라는 게 뭔지 폼페이우스는 충분히 알았지만, 압도적인 수와 보급의 풍부함, 그리고 자신의 지휘력을 볼 때 패배할 리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와중, 디라키움 공방전의 승리로 인해 폼페이우스의 진영에서는 벌써 전쟁에서 이긴 것만 같은 분위기가 퍼져있었다. 메텔루스는 마치 자신이 최고사령관인 양 행동 했고, 원로원 의원들은 벌써부터 누구의 공적이 컸는지, 누가 무슨 자리에 앉을지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다. 지휘 계층의 이러한 분위기는 병사들에게까지도 전염되었다. 한편, 카이사르 진영은 긴장이 감돌았다. 폼페이우스의 승리는 원로원파의 승리이며, 그것은 민중파의 괴멸을 의미했다. 게다가 폼페이우스 측은 이미 사로잡은 카이사르의 병사들을 처형한 경력마저 있었다. 패배는 카이사르는 물론, 일반 서민인 병사들에게도 종말을 의미했다. 카이사르와 지휘관들, 병사 모두가 비장한 각오를 한 가운데, 결전의 그 날, 카이사르는 본진의 수비병력도 남기지 않고 모든 병사에게 출동 명령을 내린다. 폼페이우스 58세, 카이사르 52세, BC 48년 8월 9일의 일이었다. - 파르살로스 대전 이러한 서로 상반된 분위기 속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의 승패를 나눌 기병의 수는 카이사르 측이 약 1천여 기, 폼페이우스 측이 약 7천여 기로 숫자상으로만도 7배의 전력 차이였다. 통상 기병이 무서운 이유는, 보병으로써는 대적하기 힘들다는 점에 있다. 같은 무기, 같은 체격이라고 할지라도 말에 타고 달리면서 생기는 가속도가 무기에 실려 무서운 파괴력을 낸다. 이러한 기병의 공격에는 보병의 방패는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한다. 거기다가 말에탄 기병은 정면에서 보게되면 굉장히 크게 보인다. 이는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보병에게 큰 부담이 되며, 선진이 기병에 의해 쓰러지게 되면 공포는 급속도로 전염되어 진열이 흐트러지게 된다. 그리 되면 남은 것은 괴멸 뿐인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2배가 넘는 보병 전력과, 7배에 달하는 기병 전력, 그리고 기병을 활용한 강습 작전으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여기서 상식을 뛰어넘는 작전을 구사 한다. 보병으로 기병에게 맞서기로 한 것이다. 갈리아 원정 초기부터 지금 껏 10년 가까이 함께 싸워온 베테랑 병사들만으로 따로 부대를 편성, 이를 히든 카드로 사용 하기로 결심한다. 이 베테랑 병사들은 10년 가까이 카이사르와 함께 싸우면서, 그의 명령이라면 불속에라도 뛰어들 정도의 충섬심과, 풍부한 전투 경험에서 나오는 배짱이 있는 병사들이었다. 카이사르는 우리의 승패는 그대들에게 달려있다며 격려 해준다. 전투 시작 후, 출동한 폼페이우스 측의 기병을 카이사르의 1천여 기의 기병이 유인, 완전히 최고 속도를 내지 못한 지점에서 정면을 베테랑 병사들이, 후면을 기병이 감싸는데 성공하면서, 폼페이우스의 기병은 큰 피해를 입고 패퇴한다. 기병의 패퇴는 보병 진열에도 영향을 주어 진열이 흐트러진 폼페이우스의 보병은 카이사르의 보병에게 밀리고 만다. 폼페이우스 측 사망자 6천여 명, 포로 2만 4천여 명, 카이사르측 사망자 200여 명으로 파르살로스 전투는 폼페이우스의 완패로 끝난다. (로마 한 개 군단은 6천명으로 구성 된다) 평생 단 한 번의 패배도, 후퇴도 한 적 없는 폼페이우스. 그는 '좌절'이란 걸 모르고 살아온 승리자였다. 그런 만큼, 찾아가는 동방의 클리엔타스들에게 문전박대를 받을 때 마다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진다. 에게 해(海) 주변의 나라들을 전전 하다가, 이집트의 왕에게서 환영의 답변을 받고 이집트로 향하는 폼페이우스. 그것은 이집트 고관들의 흉계였다.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폼페이우스는 자신을 마중 나온 무리에서 자신의 밑에서 백인대장을 지냈던 셉티무스를 보고 안심했지만, 그의 비수에 찔려 삶을 마감한다. 며칠 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다. 그는 거기서 폼페이우스의 목과, 그의 반지를 건네 받는다. 그때 카이사르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의 내전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았다." (BC 48, 10월 4일) - 내전기 이후 폼페이우스의 사망으로 내전은 일단락 된 상태였지만, 카이사르는 아직 로마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집트 내전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이 때 당시 21세였던 클레오파트라와 만나게 된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게 되는데, 카이사르의 아들이란 뜻으로 카이사리온이라는 이름이 주어지게 된다. [ 이 아이가 진정으로 카이사르의 아들인가 하는 사항은 야사에서 흥미롭게 다루는 오랜 소재였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가 처음 만났을 당시, 자신의 남동생(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과 결혼한 상태였으므로 이를 근거로 나오는 이야기인데, 카이사르가 카이사리온이라는 이름이 주어지는 데에 어떠한 반대를 하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아들이라고 인정했던 것 같다. 단, 동방의 여자였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를 왕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했고, 자신의 아이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에 카이사르의 유언장에서 자신과 카이사리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자 실망하여 이집트로 돌아간다. ] 이집트의 내전을 마무리 짓자, 이번에는 소아시아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카이사르는 그곳으로 향한다. 여기서도 간단히 승리 후, 원로원에 보낸 보고서에서 그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라는 명언을 남기게 된다. 이탈리아를 떠난지 1년 8개월만에 이탈리아로 돌아온 카이사르. 그는 일반 시민들로 이루어진 의결 기구인 민회에서 다시 한 번 독재관에 임명된다. 이로써 명실상부 로마의, 그리고 고대 세계의 최고 통치자가 된다. 독재관에 임명 된 카이사르는 북아프리카로 진군한다. 여기서 자리잡고 있던 메텔루스가 이끄는 최후의 원로원파의 군대를 무찌르고 기원전 46년, 로마에서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하게 된다. - 개선식 카이사르의 개선식은 네 차례에 걸쳐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그가 무찌른 적이 갈리아, 이집트 반군, 소아시아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파르케나스, 북아프리카에서 원로원파의 편을 든 누미디아, 이렇게 4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같은 로마인끼리의 전쟁인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은 개선식을 올릴 수 없는 사항이었고, 북아프리카의 원로원파는 누미디아를 무찔렀다는 명목으로 치뤄졌다. 개선식 후, 모든 병사들에게 포상금이 지급되었다. 말단 병사의 경우, 35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돈이 지급 됐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됐지만, 이전의 술라나 마리우스 처럼 복수극을 벌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칼을 들이댔던 모든 적들을 용서하고 관직도 그대로 복권 해 주었으며 재산과 권리도 보장해 주었다. 그의 이러한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관용'이었다. - 그 후... 카이사르는 본국과 속주의 삶을 똑같이 개선하고, 정치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높이고, 속주의 로마화를 가속하기 위한 여러 개혁을 실시했다. 행정관에 해당하는 법무관, 회계감사관, 안찰관을 늘리고 속주를 재편성하고 속주의 자치에 편의를 제공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민간업자들이 걷던 세금을 국가에서 걷도록 하였으며, 공공 기반 시설의 대대적인 건설에 착수하였다.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으며, 해방노예를 등용하고, 심지어 외국인인 속주 출신의 인물을 원로원 의원으로 발탁하기도 하였다. 종래에 원로원 의원만으로 이루어지던 배심원의 기준을 일정 재산을 가신 로마 시민이면 누구나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심지어 한때 노예였던 사람마저 배심원이 되어 재판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은 이미 당시 로마 사회에서 심화되고 있었던 양극화 현상을 줄이고, 더 이상 도시 국가 로마가 아닌, 세계의 중심 제국 로마에 걸맞는 제도를 갖추어 불평등을 줄이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이 과정에서 카이사르는 종종 빠른 의결을 위해 원로원의 의결을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결재를 하기도 했으며, 제도의 겉 모습은 그대로 유지하되, 1인의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하였다. 그로인해 그의 정적들은 그가 왕이 되려 한다고 불만을 품었고, 그가 종신 독재관이 되자 폭발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운명의 BC 44년, 3월 15일, 암살자들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두고 만다. - 인물평 카이사르가 독재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로마 시민들의 뜻에 의해 민회 의결을 통해서 종신 독재관에 임명된 것이었으며, 그의 사후, 그를 사모하는 성난 시민이 무리지어 암살자들을 쫓았던 것에서 알 수 있 듯이, 그를 반대하는건 기득권을 빼앗긴 소수의 귀족들 뿐이었다. 더군다나 카이사르가 만약 다른 인물들 처럼 정적들을 숙청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었기에, '자유 수호'라는 기치를 내걸고 그를 암살한 암살자들의 행위는 인정하기 힘들다. 그들로 하여금 다시금 내전이 일어나게 됐으며, 그로 인해 로마 시민들은 다시 한 번 고통 받게 되었다. 또한 반대파를 제압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후의 아우구스투스)가 숙청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여 나쁜 선례를 남기게 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을 무력화 시키고, 호민관 제도를 사실상 폐지하였으며, 각종 행사나 서커스 등으로 시민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리려고 한 것은 그의 잘못으로 지적 된다. 이는 독재 체제의 확립을 위한 것으로 민주정치에 위배되는 일이나, 고대 사회였고, 당시의 낮은 교육률로 모든 시민이 책임있는 정치를 행사하기 힘든 것을 고려할 때 용인이 가능한 부분이 아닌가 한다. 뛰어난 언변의 소유자로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모두에게 사랑받던 카이사르. 가지지 못한자를 위해 일어섰던 그는, 자신에게 칼을 들이댔던 적 조차 최대한 용서하려 했으며, 시대를 앞서가는 자신의 생각을 실현 시키기 위해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는 했으나, 지금도 서양사에서 그 누구보다 빛나고 우뚝 솟은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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